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한창 개방 정책을 펴고 있던 1990년 여름, 필자는 소련의 사회 문화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 보름 동안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여 페테르부르크, 카자흐스탄 등 몇몇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가 미국과 함께 양대 강국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소련이 의외로 가난했다는 것, 두 번째가 가난 속에서도 문화예술만은 대단히 풍성했다는 것이었다. 전국 수백 개의 국립극장을 두고 매일같이 연극, 발레, 오페라, 음악회 등이 쉼 없이 공연하고 있었으며, 레퍼토리도 유럽 나라들과 별 다름 없는 세계 명작들이었고, 시민들은 저녁밥은 못 먹어도 발레나 연극 구경에는 열심이었다. 그 광경을 목도하면서 필자는 소련의 개방화는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소련의 문화 상황을 보면서 그들의 개방화를 하나의 필연이라 생각한 것은 북한의 획일적인 목적예술 일변도와는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웠던 점은 일반 예술뿐만 아니라 어린이 예술 역시 번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모스크바에만도 어린이 전용 극장이 10여 개나 있었고, 각 극장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수준 높은 작품들이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었다. 보통 어린이극이라고 하면 유치한 인형극을 연상하지만 그곳에서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극장은 전속 오케스트라까지 두고 세계적인 명작들을 공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이 수시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한편, 인형극 전문 공연은 별도로 두고 유치한 동화가 아니라 일반 극장들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적인 명작들을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안하여 만든 것이어서 어른들도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만 했다. 출연진 역시 아역들이 아니라 유명한 성인 배우들이었다는 점에서 일반의 상식을 깨고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공연 전에 연출가가 아이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한 사전 해설까지 친절하게 해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함께 구경 온 아이들의 부모들 역시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부러웠던 것은 그곳 초등학교생들이 대체로 두 종류의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오전에는 일반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발레라든가 음악, 미술, 연극 등 자기 취향에 맞는 학교에 가서 마음껏 조기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세계 최고 수준인 그들의 문화 전통 배경을 실감했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와 학원만을 오가며 영어 수학 공부만 반복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딱했고, 그들의 정서 교육은 어떻게 되는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만시지탄의 감도 없지는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김영종 종로구청장의 선각적 결단으로 금년(2016년) 4월 대학로에 역사적인 어린이 전용 극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도 마지못해 억지춘향 격으로 한 것이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보고 본격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건물 구조에서부터 내장(內粧)에 이르기까지 정성들여서 세심하게 만들었던바, 그 점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정서적으로, 미적으로, 학구적으로, 그리고 안전까지 배려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종로구청이 앞장서서 그처럼 아름답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은 전국에 산재한 대형 극장들처럼 관 주도가 아니라 전문가들(아시테지(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 김숙희 이사장 등)의 조언을 수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운영까지 전적으로 일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또한 우리나라 극장사(劇場史)에 좋은 선례가 될 만하다.
가령 독일 문호 괴테가 어린 시절 할머니가 집에서 만들어 보여준 인형극을 보면서 일찍부터 무한한 상상력을 키웠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유년 시절의 정서적 감동이라든가 충격은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귀중한 체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순수하고 아름다운 예술 체험은커녕 범람하는 퇴폐적인 성인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오늘날 성인들을 뺨칠 정도로 넘쳐나는 청소년들의 성폭력 문제도 사실은 유소년 시절의 정서 교육 부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어린이 청소년 예술 교육이 절실하고 시급한 것이다. 여러 가지 예술장르 중에서도 선진국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직접적이고 설득력이 강한 공연예술이 적합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종로구청이 최초로 만든 ‘아이들극장’이 높이 평가되고 주목받는 이유다.
그런데 문제는 종로의 ‘아이들극장’을 어떻게 운영해갈 것인가이다.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문제가 상업성이라 본다. 돈벌이를 염두에 두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다행히 이 극장의 예술감독이 개관을 앞두고 “상업적인 공연 대신 작품성이 뛰어난 공연으로 프로그램을 짰다”고 설명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며 ‘아이들극장’의 장래를 낙관하게 한다. 솔직히 좋은 상품에 구매자가 몰리듯이 작품만 훌륭하면 관객은 걱정 안 해도 된다. 시장은 광범위하지 않은가. 여하튼 ‘아이들극장’은 처음부터 교육장이라는 확고한 인식하에 운영의 기본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모든 레퍼토리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정서 교육이라는 기본 방침에 입각하여 취택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어린이극이라고 해서 과거처럼 동식물이나 등장시키는 유치한 동화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세계 명작들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게 개작, 번안하여 레퍼토리화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또한 연중 무휴 공연을 원칙으로 하여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유능한 전담 작가와 연출가를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내에 좋은 레퍼토리가 절대 부족하다고 해서 외국 작품 초청에만 의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필자가 권하고 싶은 것은 우선 전통이 오랜 러시아라든가 영국, 프랑스, 등의 어린이 청소년 연극 운용을 심층연구해보라는 것이다.
솔직히 수도 서울에 280석의 소극장 하나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서울에는 수백 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등학교가 있으며 수백만 명의 어린이 청소년들이 정서 교육에 굶주려 있다. 따라서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많은 대학로의 개성 없는 소극장들 중에서 시설이 괜찮은 극장부터 어린이 청소년 극장으로 전환해갔으면 한다. 이러한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주요 도시마다 훌륭한 어린이 청소년 극장들이 생겨난다면 우리의 미래가 희망으로 가득 찰 것이며 종로구청이 시작한 ‘아이들극장’은 2016년 연극계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본 칼럼은 유민영 에세이<무대 위 세상 무대 밖 세상>(푸른사상)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댓글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