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15년에 발행한 2014 문예연감의 자료에 따르면 2014년에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연극 중 아동청소년연극의 비율은 공연 건수 기준으로 44.4%, 공연 횟수를 기준으로 31.4%를 차지한다. 통계청에서 집계하는 인구 연령 비율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20% 내외다(청소년의 연령을 어떠한 기준에 맞추느냐에 따라 수치가 달라진다). 어쨌거나 그 비율에 비추어 보았을 때 한국 공연계에서 아동청소년극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이전까지는 대한민국에 국립 혹은 공립 어린이 전용 극장이 없었고 공연을 보러 극장을 찾는 어린이들은 가파른 계단과 어린이가 앉기에 불편한 의자를 감내해야만 했다. 아동극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아동청소년 연극계는 꾸준히 국공립 어린이 전용극장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2015년에 광주, 부산 기장, 그리고 서울에 각각 한 개씩 국공립 어린이 전용극장이 생긴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실로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중 종로구의 아이들극장은 어린이날에 맞춰 2016년 4월 30일에 개관하였다. 종로구민을 위한 체육시설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이 증축되며 그 안에 생겼는데 2015년 취재 당시만 해도 운영 주체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올 초에 재단법인 종로문화재단에서 운영을 맡기로 결정되었고 초대 예술감독으로 아시테지 한국본부 김숙희 이사장이 선임되었다. 개관 전 극장 이름 공모에서‘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드넓은 공간’이 되라는 의미로‘아이들극장’이라는 이름이 선정되었다. 종로구는 아이들극장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아동청소년극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며 아동극 특성에 맞는 극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보였다. 그 결과 아이들극장에는 객석, 출입구, 화장실 뿐 아니라 로비에도 어린이들의 안전과 편의를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처음으로 아이들극장을 방문한 성인들은 의자와 화장실이 불편하다며 불만을 늘어놓기도 하는데, 필자는 그럴 때마다 그 동안 일반 극장을 이용한 어린이 관객들이 얼마나 불편했겠냐고 반문하고는 한다. 어린이 전용극장이 높은 수준의 공연 이외에도 어떠한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아이들극장은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아동극”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하지 않을까? 권선징악, 친구와의 우정, 동물의 의인화, 어린이를 연기하는 성인 배우, 알록달록한 소품과 세트, 시끌벅적한 음악, 그리고 행복한 결말. 종로아이들극장 개관작이자 제1회 아동창작희곡상 수상작인 “무지개섬 이야기”는 이 중 대부분에 해당하는 아동극이다. 어디선가 본 듯하고,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야기. 그럼에도 “무지개섬 이야기”에는 신선함도 있고 감동도 있다.
어느 섬에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살고 있다. 부부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는데 아내가 그만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만다. 상심한 남편에게 의원은 고래 꼬리가 부인의 병을 낫게 할 특효약이라고 하고, 남편은 아내의 병간호도 뒷전으로 미룬 채 매일매일 고래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간다. 그렇지만 고래는 잡히지 않고, 아내의 병세는 깊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자신이 좀 나은 것 같다며 남편에게 함께 바다로 가고 싶다고 간청한다. 함께 바다로 나간 부부는 새끼 고래를 낳고 있는 어미 고래를 발견하고, 남편이 어미 고래에게 작살을 던지는 순간 고래의 저항으로 인해 배가 뒤집히며 아내는 영원히 바다 속으로 빠지고 만다.
아내가 죽은 후 남편은 아들 용기의 양육은 내팽게치고 아내를 찾겠다며 자신의 작살로 한 쪽 눈이 망가졌을 고래를 찾아 매일 바다로 향한다. 용기에게는 제대로 된 가족도 친구도 없지만 남들에게 없는 한 가지 능력이 있다: 바로 동물들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다는 것. 용기는 바닷가의 게들을 벗삼아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 용기 앞에 아기 고래 아쿠가 나타나는데, 알고 보니 아쿠는 아빠가 찾던 그 고래의 새끼였다. 아빠는 아쿠의 어미를 잡기 위해 아쿠를 잡아 두지만, 용기는 아빠와 마을 사람들 몰래 아쿠를 풀어준다.
마을에 날치떼가 출몰하고 모두들 날치 잡이에 신이 난 사이, 용기는 날치들로부터 해일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쿠는 어미 고래에게 마을을 지켜달라고 간청하고, 결국 어미 고래는 자신의 몸으로 해일을 막아내 용기네 마을 사람들을 구해준다.
“무지개섬 이야기”는 이렇듯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아빠 물고기가 잃어버린 아들 물고기를 찾아다니며 둘 다 용기를 찾고 결핍을 극복해 내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도 생각이 나고, 주인공이 동물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능력으로 공동체에 닥친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디즈니의 “프린세스 소피아”시리즈도 생각난다. 어른들로부터 기인한 문제를 어린이가 용기와 우정, 그리고 그에 기반한 행동을 통해 해결한다는 서사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의 단골 내러티브다. 가족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주인공이 동물 친구의 도움으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적인 가족을 꾸리는 것 역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이런 서사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재치 있는 연출이다. 성시어터라인의 연출가 김성제는 우리가“아동극”하면 떠올리는 익숙한 연출기법들을 적절하게 버무려 익숙하지만 그래서 편 안한, 그러면서도 작지 않은 아이들극장 무대를 꽉 채우는 공연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들을 가장 즐겁게 한 것이 동물을 표현한 방식일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매력적인 게들과 얼핏 보면 진짜 같은 개들은 몸을 던지는 배우들의 열연과 재치있는 소품으로 많은 웃음을 선사하고, 커다란 부채들로 표현되는 고래의 모습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난 10여년간 한국의 아동극계에는 연극놀이를 기반으로 소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연극이 대거 등장하였고, 이 작품 역시 그러한 경향을 반영한다. 개인적으로 공연을 보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아쿠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이었는데(아쿠 역의 배우가 한 쪽 손으로 커다란 무지개를 그리며 “아아아아아쿠”라고 고래 초음파 같은 비명을 지른다), 공연이 끝난 후에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이 그것을 흉내낸 것을 보면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용기가 처한 현실이 실은 아빠에 의한 방임이라는 지극히 어두운 것인데 김성제의 세심한 연출은 가벼운 장면과 무거운 장면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추었다.
순회 공연을 염두에 두고 적은 수의 배우로 꾸려가는 동시대 아동극의 추세와 달리 “무지개섬 이야기”는 일곱 명의 배우와 두 명의 라이브 뮤지션을 무대 위로 올린다. 바로 그 점이 “무지개섬 이야기”가 비어 있는 무대에도 불구하고 꽉 찬 느낌을 주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보통 네 명 내외의 배우들이 악기도 연주하고 이야기꾼 역할도 하고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가 많은 아동극에 이렇게 많은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새삼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몇 명 배우들의 미숙한 연기였다. 배우들은 동물을 표현하는 움직임에 있어서는 서로 한 몸인 듯 잘 어울리지만, 정극 연기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는 무대 경험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들은 슬픔이나 두려움의 감정은 오열과 비명만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많은 무대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할 듯 하다. 더구나 약280석 규모의 극장에서 굳이 마이크를 차고 공연을 한다는 점도 배우들의 자신감 혹은 능력 부족을 보여준다. 경험이 풍부하고 연륜 있는 전문 배우가 부족한 한국 아동청소년극계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했다.
하지만 일부 아쉬운 연기에도 불구하고 “무지개섬 이야기”는 아동극계에서 또 하나의 레퍼토리로 자리잡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요즘처럼 아동극이 오브제극 위주로 제작되는 상황에서 탄탄한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차별점이 될 수 있다. 웃음과 감동을 함께 선사하는 “무지개섬 이야기”가 함께 즐기는 가족극을 표방하는 극단 성시어터라인의 대표작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어떠한 모티프나 내러티브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와 비슷한 일들을 겪는다는 뜻일 것이다. “무지개섬 이야기”를 보는 어린 관객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나 자신과 친구에 대한 믿음, 그리고 행동을 통해 바꿀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고, 어른 관객들은 자신이 아집에 사로잡혀 혹시나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것이다. 함께 힘을 합쳐 행동하면 아집에 사로잡힌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2016년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교훈인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개관 이후에 꾸준히 좋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는 아이들극장이 주말마다 찾아가서 공연을 보고 싶은 곳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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